평론, 심귀연
혐오의 시대에서 연대의 시대로
혐오와 폭력의 시대 혹은 포스트코로나시대로 대변되는 지금, 우리의 혐오는 이질감에서 비롯된다. 그 이질감이란 객체의 타자화이다. 모든 존재들은 고유성을 지니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질성이 서로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차별로 가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고유성을 헤치지 않는 한에서의 연대는 불가능할 것인가? 작가가 ‘원’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 연대의 가능성에 있다.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인 것처럼, 내 어제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내 앞의 당신은 나일 수도 있다. 나와 너는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다르지만은 않다. 그래서 작가는 “‘나’는 무수한 경우의 수가 모여 생긴 단 하나의 개체”이자 “과거의 경우 수와 미래의 경우의 수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경계없는 존재”인지 묻는다.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바로 이렇게 연결된 우리를 말한다.
구별짓기-확장시각
인간은 성별, 거주, 소득, 학벌 등에 따라 경계지워진다. 그러나 그 경계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할 수 있을까? 경계는 구별이 되고, 구별은 차별이 되겠지만, 관계 속에서 개인의 확장된 시각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작가의 작품 <꼭꼭 숨어라, 경계를 찾아라>는 역설적으로 경계없음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한다.
<너를 나로 보는 시각> 시리즈 연작에서 작가는 인간의 상호관계성을 표현한다. 타인과 분리되어 살아갈 수는 없는 고유성을 상실한 일반명사로의 ‘내’가 될 수 있다. 작가는 사회현상을 보다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원과 원을 이루는 섬유의 조형 등은 각각의 인간이 다양한 카테고리로 ‘구별짓기’하여 경계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연대의 가능성을 꿈꾸고 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해 섬유의 엮임은 우연과 우연이 엮어 ‘내’가 되고 우리가 되고, 끊임없이 유동하는 동사적 존재로 확장된다.